삼가면은 삼한시대에는 산반계국이란 부족국가의 옛터였다.
수 년전 양전리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삼한때의 것으로 추정되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. 고려 때는 삼기현과 가수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을 조선조 태종13년(1413년)에 첫 글자를 떼 삼가라 불렀다.
삼기현은 지금의 대병면이었고,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당초에는 인근 대병면에 삼지현을 설치했으나, 35대 경덕왕이 지명을 삼기현이라 고치고 강양군의 영현으로 예속시켰다. 그 후 고려 8대 현종 9년(1018년)에 합천의 속현으로 두었으며 공민왕 22년(1373년)에 감무를 두어 다스렸고, 별호는 마문이라고 했다. 가수현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가규화현으로 불렸고 35대 경덕왕 때 강주(진주)의 영현이 되기도 하였다.
고려조 이후부터 삼가현의 현청을 현재의 삼가족으로 옮기고 현감을 두었는데 1914년에 합천군에 병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일부, 동리, 용흥, 외토, 어전, 하판, 두모, 소오, 덕진, 문송, 학리, 양전 등 13개 법정리동에 34개 행정리동과 61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. 이 곳 사람들은 60년대 까지만 해도 합천읍보다 인구가 많아 읍으로 승격될 꿈에 부풀기도 했으나 사람들이 떠나고 남은 빈자리가 너무 커 읍민의 꿈은 멀기만 하다.
삼가는 옛 뿌리가 도처에서 역사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. 퇴계선생과 버금가는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의 사당과 이순신 장군이 사흘동안 쉬어 갔다는 기양루 향교인 명륜당, 장군비석과 백악산성, 석빙고 등 많은 유물, 유적이 아직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. 남명사당은 그의 외가인 외토리 토동에 있다. 조식선생은 그의 외할머니가 큰 인물이 태어날 현몽을 꾼 덕으로 외가인 이 곳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이 곳에서 보냈다. 그는 후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고 후학들을 길러낸 뇌룡정은 지금도 학당으로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.
기양루는 조선조 중엽에 건립된 이층 누각으로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때 합천에서 남해쪽으로 내려가면서 이 누각에서 묵었다고 전해지고 있다.
기양루는 지방문화재 9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, 원래는 이 고을 태수의 관사와 관청이 있었던 곳이다. 삼가향교는 교동부락에 위치하고 조선조 때 삼가현 내 18개 문중의 유림이 합세하여 설립했다고 하는데, 한때는 이곳에서 서당을 운영하면서 충효사상을 가르치는 교육의 전당이었으나, 지금은 여름 향교로 개방하여 뜻 있는 사람들에게 예법을 가르치고 있다. 또한 백악산성은 현재 허물어져 가고 있는 상태이나 곽재우 장군이 왜군과 싸웠다고 하며, 이 산성에는 봉수대가 남아있고 임진왜란때 의병 500명을 이끌고 싸우다 전사한 승정원 좌승지 김남촌의 비석이 외롭게 서 있을 뿐이다.